삶 이모저모/방문장소 일지

[2024. 08. 18] 양주 가족 나들이

immoderate케이 2024. 8. 19. 00:08

간만에 부모님과 나들이를 다녀왔다! 양주에 미술관이 있어서 거기서 하루를 보낸다고 하셨다. 어디로든 미술관 > 식당 > 카페의 코스는 항상 환영.

미술관 구조가 특이하게 되어 있었다. 안내소 같은 작은 건물을 통과하면 조각공원이 나오고, 관광객들이 물놀이를 하는 개울이 흐르고... 그 개울 위 다리 건너 장욱진 미술관 본 건물이 나온다. 안내소 바깥쪽에는 양주 시립 민복진 미술관과 갤러리 카페를 비롯한 부속건물? 느낌의 장소들이 서 있었다.

규모 큰 미술관을 구경한다기보단 미술단지 내지 테마파크를 방문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장난감 박물관이나 곤충 박물관 등, 소소하게 놀거리를 제공하는 듯 보이는 곳들이 근처에 많이 있었다. 실제 전시 퀄리티는 모르겠지만 그 곳들도 잠깐 구경하기 나쁘지 않을 듯하다.

조각공원의 전시물이 내가 흔히 접하던 것과는 다르게 느껴져서 흥미로웠다. 아니면 가족과 함께 구경하며 이야기하면 모두 당연히도 달라 보이는 걸까.

민복진 작가의 작품 "가족"

조각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작품. 이 바로 바깥에 딸린 민복진미술관의 주인공인 민복진 작가님의 작품이다. 곡선이 주를 차지하면서도 머리와 얼굴에 각을 적당히 넣어 균형을 지키시는 듯. 작품들이 전부 포근한 양감이 가득하다.
내가 이후 좀 더 서술하겠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상이 어떠하든 작가님 본인은 상냥한 작품세계를 지향하신다고 느껴진다.


노정석 작가님의 "휴(休)"

사실 작가 이름은 틀렸을 수도 있다. 기왕이면 명판이 더 잘 보이게 찍을걸. 그냥 지나쳤을 때는 윗몸일으키기 운동기구인 줄 알았다. 작품의 제목으로 보아, 아무래도 작가 본인도 "작품인 줄 모르고 지나치다 앉아 쉬기도 하는 작품"을 지향하신 모양이다.


민복진 작가의 "아기와 엄마".

다시 민복진 씨 작품이다. 민복진 시립미술관이 바로 부속건물이다시피 해서인지, 그 분 작품이 많다. 작품의 소재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느낌이 부드러워서 이 곳의 분위기를 평온하게 유지하는 데 한몫하는 듯.

조각을 둘러싸고 핀 맥문동이 멋지다.

박기진 작가의 "통로".

잠수함 안에서 볼 것 같은 형태의 작품이다. 베트남에서 보았던 정부의 비밀 벙커를 닮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저런 모양의 조형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 같아서 좋아했다. 언덕 등성이에 박은 위치로 보아, 작가님의 의도도 아마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색깔만은 애기똥풀을 닮은 듯하다.

무슨 꽃인지는 모르지만 작은 크기임에도 꽃잎이 겹겹히 싸인 게 예뻐서 찍었다.


김영민?? 작가의 "추억을 담은 집".

요즘 핸드폰은 사진 화질이 좋아졌다지만 이 정도 크기의 글자를 이 정도 거리에서 찍으면 알아보기가 힘들군... 작가님 이름은 틀렸을 가능성이 98프로다... 제목도 모습도 귀여운 작품인데, 근처에 계속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덕에 꼭 잠자리를 보고 손을 뻗은 것 같아서 더욱 보기 좋다.


김태은 작가의 "언덕 위에 발화점".

처음 만들어졌을 때 의도한 건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하얀 칠이 군데군데 벗져진 덕에 자작나무 줄기 같아 보이는 작품이다. 타고 남은 숯처럼 울퉁불퉁한 양감이 마음에 들었다.


심병건 작가의 "바람개비".

선풍기 같기도, 풍차 같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엉뚱하게 열대어 구피 생각이 났다. 어중간하게 비행기를 닮은 외양으로, 바람에 실려 날아오를 것 같단 인상을 주는 건 매한가지다.


신치현 작가의 "꽃밭".

작품의 전체적으로 깔린 구멍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을 받은 풀이, 작품의 구멍을 통해 털처럼 자라나온다. 아까의 <휴(休)>라는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야외의 공원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의미를 얻는 모양이다.


문신 작가의 "무제".

본가에도 이 무진이라는 작가의 데칼코마니 판화가 있다. 대칭 소재를 중심으로 작업하는 작가인 모양이다. 길게 뻗은 받침 위로 날개처럼 펼쳐진 둥근 도형과 날이 선 도형은 대칭 구도로 인해 한층 완벽한 균형감을 얻는다.

이런저런 부속 건물 중에 장욱진 미술관은 이 곳이다... 아마도.

오늘은 미술관 단장일이라서 직접 들어가진 못했다. 아쉽긴 하지만 푸른 언덕 위에 펼쳐진 파란 하늘, 흰 뭉게구름, 그 아래의 창문 큰 건물이 그 자체로 참 좋은 풍경이라, 이걸 볼 수 있단 사실이 뿌듯했다.

이원무 작가의 "가족".

언급했듯, 안내소 바깥쪽에는 양주시립 민복진미술관이 있다. 1층은 민복진 작가님의 작품 스타일과, 작가님의 주 소재인 가족과 사랑을 테마로 삼은 형태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의 가장 큰 포인트는 직접 만지고 기댈 수 있는 작품들이다. 가만히 서서 구경을 하기에는 곤란한 시각장애인을 염두에 두어 전반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모양이다. 어린아이들이 즐기기에 편한 환경이기도 하다.

위 작품 역시 그 의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모양이다. 단순하고도 명료한 모습으로 서로 맞잡은 손이 보기 좋다. 알루미늄 특유의 매끈하면서도 어딘가 부드러워 보이는 양감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김혜원 작가의 작품들. 왼쪽부터 차례로 "가족", "아기와 엄마", "가족", "사랑", "아기와 엄마".

이쪽 역시 만질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이쪽은 민복진 작가의 작품들이 모티브란 사실이 제목과 모양 등으로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안에 채워 넣은 건 솜이려나? 보기만 해도 부들부들하고 포근해 보이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콯롷낳 때문에 격리하던 입장이라 맘 편히 쓰다듬는 건 삼가야 했다.

민복진 작가의 작품을 모티브로 해 기댈 수 있는 전시. 근처에는 누울 수 있는 의자들도 있다.

이런 관객 참여형 전시는 근래 들어 좀 더 많아진 느낌이지만 이 곳은 유난히도 편안한 분위기라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거대한 쿠션 같은 빈백 의자들도 많이 있고, 민복진 작가 조각을 축소한 듯한 모형을 앉아서 스케치할 수 있는 곳도 있고... 앞에 종이를 두고 열심히 스케치하는 아이들이 많았음. 나도 그리긴 했다. 너무 부끄러운 실력이라 올리긴 그렇지만.

마치 워크샵 같은 분위기의 전시장. 이렇게 수납장에 조각이 줄줄이 늘어선 형태의 갤러리도 참 멋진 듯.

2층은 민복진 작가의 조각 몇 점과 함께, 그 조각을 만드는 데 활용되었을 거라 추정되는 합성수지 모델들이 있었다. 유사한 소재와 형태임에도 각 조각의 개성이 은밀히 살아 있어 흥미로웠다. 제목들 또한 비슷비슷하면서도 은근히 다르다. "엄마와 아이", "모자" 등등.

민복진 작가의 조각, "모자". 마치 요람과도 같은 형태.

이쯤에서 민복진 작가의 작품들에 대한 내 개인적인 감상을 작게 이야기하자면, 내가 내 현 상태로 존재함으로써 부모님께 상처를 주는 경험만 하지 않았더라도 보다 와닿는 전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난 그다지 건강한 정신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그게 내 자신에 대한 핑계가 아닌가 생각할 때도 많지만, 내 삶에 대한 태도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말씀을 자주 듣는 걸로 보아 근거 없는 판단은 아닌 모양이다(그 말씀을 건네는 분이야말로 삶에 대한 태도가 이전과 달라졌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라는, 그런 심술맞은 생각도 들지만). 관련해서 치료를 받은 경험도 많으니 더욱이나 지금도 상태가 좋지 않다고 추측할 이유가 있겠지. 정신 상태가 왜 이런지 원인을 대려 한다면 그것도 어렵지 않다.

아무래도, 난 마음이 건강하지 않다. 근래에는 그 때문에 어머니께서 스스로를 탓하시는 걸 많이 들었다.

난 우리 가족 모두가 각자의 상황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고통을 겪는다. 난 그래서 가족의 본질적인 애정을 믿으면서도 믿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아픔을 겪고도 서로를 포기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기에 가족애를 높이 평가할 수는 있지만, 그게 마냥 따뜻하고 위안을 주는 거라고 느껴진다기엔, 글쎄. 그런 애정이 여타 사람 간의 애정과 비교해서 더 가치가 있는지도, 믿으면서 믿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상태가 이리 부정적이지 않았다면, 내 생각도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 뭐, 그것야말로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데 전념하는 작가는 귀하다고 생각한다. 모르긴 모르지만, 민복진 작가라도 삶에 어려운 점이 없었을까. 누구나 다 힘들게 산다. 그럼에도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건 강한 것이다.

양주의 평양냉면집에서 곁들여 먹은 만두. 가게 이름이 어디더라? 한국기행에 나왔다는 것밖에는 모른다.

복잡한 심경을 뒤로 하고... 꿩냉면, 이른바 꿩고기(와 어쩌면 육수)가 들어간 평양냉면을 먹으러 왔다. 원래는 어복쟁반을 시키려 했지만, 여름에는 채소가 풀이 죽어서 잘 안 내놓는다니 대신 물냉면 둘과 비빔냉면 하나에 만두 한 접시로, 어쩌면 그야말로 정석적인 차림. 만두 맛은 무난하게 슴슴했다. 때로 이런 평양냉면 집에서 내놓는 음식 맛이 너무 삼삼한 건 아닌가 싶지만, 담백하면서도 "맛있다"는 느낌을 주는 거야말로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왼쪽이 "꿩냉면". 작게 들어간 경단은 꿩의 고기와 뼈를 통째로 간 것이라 한다.

 비빔냉면 역시 비빔냉면 치고는 담담한 맛. 매운맛보단 고소함이 더 컸다.

꿩고기가 들어간 물냉면, 이른바 "꿩냉면"도 맛있었다. 꿩고기의 맛은... 닭고기와 비슷하지만 돼지고기 같은 냄새가 조금 나는 듯 하기도. 아니면 그게 꿩냉면이라고 듣고 들어서 드는 생각이지, 몰랐다면 그냥 고기경단이려니 먹었을 것 같기도 하다. 굳이 뼈를 같이 갈아넣은 이유는 모르겠다. 다른 건 몰라도 조류 뼈는 목에 걸리면 큰일이라고. 식감이 특이하단 건 확실하다만...

카페 모어그린의 사과&석류차, 디카페인 콜드브루 카페라떼, 에스프레소.

하루를 마무리하는 건 차 한 잔과 함께... 랄까. 모어그린(More Greeeen)이라는 카페에서 각자 음료수 한 잔을 마시며 쉬다 왔다. 사과+석류차는 뭐랄까 끓인 잼을 마시는 기분이 들 정도로 달아서, 이런 막나가는 짓을 한 맛을 좋아하는 나에겐... 꽤 마음에 들었다. 관광지에 지어진 카페라서 규모는 크고 분위기는 옥작복작하다. 기왕이면 베이커리까지 맛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인테리어 공사를 하느라 빵은 안 굽는다고.


평온하게 잘 마무리한 일요일이었다. 이렇게 세 사람이서 보낼 수 있는 날은 드문 편이라, 사진과 단상(斷想)으로 정리할 수 있어 다행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기를 꽤나 길게 쓰곤 했는데, 자꾸 스스로에 대해 좋지 못한 말을 길게 하는 것 때문인지 근래 들어서 일기의 길이가 점점 짧아졌다.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지나친 자학 없이 하루를 정리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선 좋은 일인 것 같다.